[주간조선]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꿈의 장치 1조분의 1초 분자운동도 훤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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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30 / 1,516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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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꿈의 장치 1조분의 1초 분자운동도 훤히 본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 구축 포항공대 고인수 단장
▲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
“기사님, 포항공대에 있는 방사광가속기라고 들어보셨어요?”
포항공대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그럼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거 아입니까?”
“들어보셨구나. 지금 또 하나 만드는데 이건 전 세계에서 3번째로 만드는 거라는데, 그건 아세요?”
“아 그래요? 그건 몰랐네. 하여튼 포항공대가 대단하네 대단해.”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포항공대 내에 있는 방사광가속기는 포항 시민들에게 있어서 포스코에 이은 또 하나의 자랑거리다. 가속기연구소에서 만든 설명자료를 보면 방사광은 ‘전자를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시킨 다음 방향을 틀어주면, 우산을 돌릴 때 빗방울이 튀어나가는 것처럼 접선(接線) 방향으로 방출되는 퍼짐이 좁은 강한 빛줄기를 말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방사광가속기는 퍼짐이 좁은 강한 빛줄기를 이용하는 장치다.
현재 가동되고 있는 방사광가속기는 1994년 준공된 3세대 가속기다. 4세대는 2014년 준공을 목표로 3세대 가속기 인근에 건설 중이다. 3세대 가속기는 전 세계적으로 30대가 넘게 가동 중이지만, 4세대는 현재 미국과 일본에서만 가동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세 번째 4세대 방사광가속기 보유국이 되기 위해 EU(유럽연합)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3세대 가속기를 통해 통신과 신약사업을 포함한 우리나라 주요 산업에 있어서 획기적 도약을 이룩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완성되면 대한민국의 신성장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노벨상 수상자 배출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미래창조과학부에서도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 사업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지난 10월 21일 4세대 방사광가속기 사업을 이끌고 있는 고인수 포항가속기연구소 4세대 방사광가속기 구축 추진단 단장(포항공대 물리학과 교수)을 포항공대 내 포항가속기연구소에서 만나 4세대 가속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허름한 청바지에 등산화를 신고 기자를 맞았다. 나중에 가속기 건설 현장에 가서야 알게 됐지만 고 단장이 신은 신발은 등산화가 아니라 현장에서 신는 작업화였다. 그는 아침 출근 전에 총 둘레 2.5㎞에 달하는 현장을 하루도 빠짐없이 둘러보고 틈만 나면 현장을 찾기 때문에 아예 작업화를 평상화로 신고 다닌다고 했다. 고 단장은 “평일에는 작업화 말고 다른 신발을 신을 일은 아예 없다”고 말했다. 그의 차 트렁크에는 건설현장에서 쓰는 작업모자도 항상 비치되어 있었다. 고 단장에게 “물리학자가 아니라 건설현장 근로자 같다”고 했더니 “가속기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부터 산을 깎는 일, 거푸집을 세우는 일을 챙기다 보니 토건업자가 다 됐다”며 웃었다.
고 단장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CLA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포항공대에 3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본부가 세워지면서 포항공대 교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3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에 참여해 현재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까지 30년 가까이 방사광가속기와 씨름했다.
“UCLA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4세대 가속기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연구되는 것들이었죠. 그런데 지도교수가 4세대 가속기를 공부해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 언제 만들어져서 언제 써먹냐’고 거절했죠.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3세대가 막 설계 중이던 때였거든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포항공대의 방사광가속기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때 공부해 둘 걸’이라며 땅을 치고 후회했었죠.”
고 단장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방사광가속기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알아야 했다. 포항으로 가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이것저것 찾아봤으나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포항가속기연구소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3세대 가속기가 국내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향후 우리나라 신성장동력 개발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너무 전문적인 용어로만 되어 있어서 도대체 이것이 산업 발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고 단장에게 방사광가속기가 무엇인지 쉬운 용어로 설명해 달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현미경이라고 보면 되죠. 원자나 분자의 운동 상태를 빛을 이용해서 관측할 수 있는 현미경입니다. 다만 현재 가동 중인 3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정지 상태를 볼 수 있는 스틸 카메라라면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운동 상태를 볼 수 있는 일종의 동영상 카메라입니다.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 발생하는 수십억 분의 일보다 빠른 광원을 통해 화학촉매반응, 분자결합, 생체반응과 같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 변화 과정을 확인할 수 없던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됩니다.”
고 단장에 따르면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나노물질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파장이 짧은 X선을 이용해야 한다. 4세대 방사광을 통해 크기가 1m의 10억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나노 크기의 물질을 볼 수 있다는 것. 고 단장은 “더 작은 물질을 보기 위해서는 더 큰 가속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말했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3세대 방사광가속기만으로도 우리나라 산업은 비약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고 단장은 삼성전자 휴대폰과 관련된 일화를 하나 들려줬다.
“삼성전자가 처음 만들었던 통신칩은 불량률이 70~80%가 넘었죠. 제조업에서 이 정도면 만드는 즉시 가져다 버린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죠. 삼성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삼성종합기술원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거기서도 해결이 안 됐습니다. 결국 이곳으로 가져와서 반도체 적층하는 과정을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해 분석했는데 부품들을 정렬해 주는 마크 자체가 비뚤어졌기 때문에 그 위에 쌓는 것이 다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준점이 틀렸는데 이 기준점을 맞다고 가정하고 그 위에 칩을 쌓으니 불량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공장에 연락해 바로 이 부분을 고치니까 불량률이 1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이때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해서 이런 부분들을 잡아내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삼성 휴대폰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 단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2003년 과학저널 네이처 표지에 실린 연구도 3세대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했다고 한다. “국내 벤처업체 크리스탈지노믹스가 비아그라의 화학구조를 3세대 가속기를 활용해 분석해냈습니다. 물론 화이자도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공개를 안 한 것이었죠. 이걸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분석해낸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땅에서, 우리나라 기술로 설계한 장비로 연구한 최초의 네이처 표지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 장비를 이용해서 네이처나 셀 등에 실리는 논문이 많이 발표됐죠.”
이런 일화들 때문인지 과학자들 사이에서 3세대 방사광가속기는 ‘경부고속도로’가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것과 맞먹는다고 비유할 정도다. 현재 건설되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다시 한 번 대한민국 경제를 도약시켜 줄 발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 단장은 4세대 가속기를 통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로 수소 연료 개발을 꼽았다.
“물(H₂O)을 이루고 있는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는 과정이 1000조분의 1초인데 현재 기술로는 이 화학 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개발되어 물의 화학작용을 분석하면 1000조분의 1까지는 아니더라도 1조분의 1 정도까지는 분석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게 되면 수소와 산소를 분리하는 기술에 조금 더 근접하게 되어 수소연료자동차 개발이 훨씬 앞당겨지겠지요. 수소를 값싸고 효율적으로 물에서 분리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물이 석유를 대체하게 될 것입니다.”
신약개발도 비약적 발전이 가능해진다. 현재 단백질과 같은 생체분자의 원자구조를 분석하려면 결정체를 만들어서 방사광가속기에 넣고 돌려야 한다. 하지만 결정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결정을 만들기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결정을 만들지 않고도 단백질 구조를 분석할 수 있게 된다. 생체막 단백질의 연구는 현재는 개발 불가능한 신약개발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인류 건강에 획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4세대 가속기는 태양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광합성 반응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어 미래 에너지원이나 농업기술 개발에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과학자들의 다양한 가설과 아이디어가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현재의 연구를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과학적 환경이 4세대 가속기를 통해 탄생하는 셈이다.
3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원형인 데 비해 4세대는 직선형이다. 4세대 가속기를 짓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포항가속기연구소에 있는 원형의 3세대 가속기는 둘레가 280m인데, 직선형인 4세대 가속기의 총길이는 직선거리 1.1㎞다. 고 단장은 “전 세계적으로 1㎞가 넘는 직선거리를 연구소 부지 내에 확보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 정도밖에 안 된다”며 “완공되면 1층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규모”라고 말했다.
포항공대에 3·4세대 가속기가 한꺼번에 들어설 수 있었던 데에는 숨겨진 일화가 있다. 특히 원형인 3세대에 비해 선형인 4세대는 훨씬 많은 부지를 필요로 한다. 현재 4세대 가속기는 72만7272㎡(22만평)의 땅 위에 건설 중인데 이는 이미 1990년에 확보된 것이다. 부지 확보와 관련한 고 단장의 이야기다.
“가속기 건설이 결정된 1987년 여름에 처음 논의됐던 부지의 넓이는 9만평 정도였습니다. 포항공대에서 일을 추진하다 보니 이런 부분도 포항제철 정명식 사장의 결재를 맡아야 했죠. 그래서 사장을 찾아가 9만평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는데 사장이 ‘다음에 짓고 싶어하는 크기가 얼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다음에 지을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머뭇거렸더니 ‘그러면 현재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가 어느 정도냐’고 해서 둘레가 1400m인 것이 최대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게 들어갈 만한 크기의 부지가 얼마인지 경계선을 그어보라고 해서 그은 게 22만평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땅이 그렇게 유효하게 쓰일 줄 몰랐는데 지금 이렇게 쓰이는 거죠. 만약 그 당시 포철 박태준 회장님이나 정 사장님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4세대 가속기 건설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윗분들은 지금처럼 분기별로 얼마의 이익을 내야 하는지 빠듯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회사가 10년 뒤에 어떻게 돼야 할지를 고민하셨던 분들인 것 같습니다.”
고 단장과 함께 4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차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실제로 보니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2011년 9월부터 시작해 건물을 설계하고 착공해서 현재는 토목공사가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지금은 바닥, 양쪽 벽, 천장의 두께가 각각 2m씩 되는 두꺼운 콘크리트 구조물을 올리고 있는 중이죠.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2014년 11월 말에 1100m 길이의 전체 건물이 준공될 것입니다. 그 후에 기계 장치를 설치하는 데 1년 이상 소요될 것이고, 전체 시스템을 동작시키는 시운전을 하는 데 3~6개월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시운전을 할 때에는 일부 과학자들이 와서 실험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실제 이용을 할 수 있는 시기는 2016년 후반기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4세대 가속기는 3세대와 달라서 많은 사람들이 쓰는 범용 기계가 아니고 뛰어난 소수의 과학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연구장치라서 외국의 우수한 과학자들도 우리의 가속기 구축이 완료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거대한 구조물과 그곳을 가득 채울 첨단장비를 생각해 보니 투입되는 예산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고 단장 역시 “가속기 건설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돈을 따오는 일”이라고 했다.
“돈이 워낙 많이 들어가는 일이고, 어느 지역에 세워지느냐에 따라서 그 지역 발전과 연관이 깊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들이 국가 주도로 가속기를 건설합니다. 민간기업이 가속기를 세운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2004년에 처음 계획됐던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우여곡절 끝에 2010년에 4000억원의 예산이 배정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등이 4세대 가속기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며 지원을 약속했지만 행정적 절차를 거치는 데만 6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이마저도 정치권의 이해관계로 인해 일부 예산이 삭감되기도 했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완공된다 해도 현재 기술로 이 장비를 100%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에서 필요로 하는 성능을 가진 카메라가 전 세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카메라 개발을 위해서 4세대 가속기 보유국이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미국과 일본이 손을 잡았고 우리나라는 독일과 협력해 미·일과 경쟁하는 구도다. 고 단장은 이 부분에 와서 우리나라 대기업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반도체 하면 우리나라가 세계 1위 아닙니까. 카메라 렌즈 기술에 있어서 세계 1위 기술을 가진 독일이 (이 분야에 기술이 부족한) 우리나라와 손을 잡은 것은 바로 이 반도체 기술 때문입니다. 원하는 수준의 카메라를 개발하려면 CCD(카메라용 집적소자)가 개발되어야 하는데 결국은 반도체 기술이 필요한 거거든요. 그래서 독일이 삼성이나 하이닉스 같은 데서 이 부분에 협력을 해주면 자기네들 기술을 주겠다는 겁니다. 근데 이 부분에 있어서 삼성이 잘 설득이 안 됩니다. 사실 (삼성에)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이게 어떤 기회인지 잘 알 텐데요. 이 부분은 꼭 기사화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국내의 과학자들은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가동되면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만큼 이 장비는 우리나라 과학 수준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 놓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목소리다.
고 단장은 “3세대 방사광가속기가 백화점이라면, 4세대는 명품관”이라며 “이런 명품관이 세계에서 3번째로 우리나라에 들어선다고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그는 “3세대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30개국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 희소성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며 “3세대는 고객을 유치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4세대 가속기는 서로 이용하기 위해 몰려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 교수는 “당연히 우선 사용권은 우리나라에 있지 않겠냐”며 웃었다.
포항공대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그럼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거 아입니까?”
“들어보셨구나. 지금 또 하나 만드는데 이건 전 세계에서 3번째로 만드는 거라는데, 그건 아세요?”
“아 그래요? 그건 몰랐네. 하여튼 포항공대가 대단하네 대단해.”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포항공대 내에 있는 방사광가속기는 포항 시민들에게 있어서 포스코에 이은 또 하나의 자랑거리다. 가속기연구소에서 만든 설명자료를 보면 방사광은 ‘전자를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시킨 다음 방향을 틀어주면, 우산을 돌릴 때 빗방울이 튀어나가는 것처럼 접선(接線) 방향으로 방출되는 퍼짐이 좁은 강한 빛줄기를 말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방사광가속기는 퍼짐이 좁은 강한 빛줄기를 이용하는 장치다.
현재 가동되고 있는 방사광가속기는 1994년 준공된 3세대 가속기다. 4세대는 2014년 준공을 목표로 3세대 가속기 인근에 건설 중이다. 3세대 가속기는 전 세계적으로 30대가 넘게 가동 중이지만, 4세대는 현재 미국과 일본에서만 가동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세 번째 4세대 방사광가속기 보유국이 되기 위해 EU(유럽연합)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3세대 가속기를 통해 통신과 신약사업을 포함한 우리나라 주요 산업에 있어서 획기적 도약을 이룩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완성되면 대한민국의 신성장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노벨상 수상자 배출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미래창조과학부에서도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 사업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지난 10월 21일 4세대 방사광가속기 사업을 이끌고 있는 고인수 포항가속기연구소 4세대 방사광가속기 구축 추진단 단장(포항공대 물리학과 교수)을 포항공대 내 포항가속기연구소에서 만나 4세대 가속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허름한 청바지에 등산화를 신고 기자를 맞았다. 나중에 가속기 건설 현장에 가서야 알게 됐지만 고 단장이 신은 신발은 등산화가 아니라 현장에서 신는 작업화였다. 그는 아침 출근 전에 총 둘레 2.5㎞에 달하는 현장을 하루도 빠짐없이 둘러보고 틈만 나면 현장을 찾기 때문에 아예 작업화를 평상화로 신고 다닌다고 했다. 고 단장은 “평일에는 작업화 말고 다른 신발을 신을 일은 아예 없다”고 말했다. 그의 차 트렁크에는 건설현장에서 쓰는 작업모자도 항상 비치되어 있었다. 고 단장에게 “물리학자가 아니라 건설현장 근로자 같다”고 했더니 “가속기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부터 산을 깎는 일, 거푸집을 세우는 일을 챙기다 보니 토건업자가 다 됐다”며 웃었다.
고 단장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CLA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포항공대에 3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본부가 세워지면서 포항공대 교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3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에 참여해 현재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까지 30년 가까이 방사광가속기와 씨름했다.
“UCLA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4세대 가속기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연구되는 것들이었죠. 그런데 지도교수가 4세대 가속기를 공부해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 언제 만들어져서 언제 써먹냐’고 거절했죠.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3세대가 막 설계 중이던 때였거든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포항공대의 방사광가속기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때 공부해 둘 걸’이라며 땅을 치고 후회했었죠.”
고 단장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방사광가속기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알아야 했다. 포항으로 가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이것저것 찾아봤으나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포항가속기연구소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3세대 가속기가 국내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향후 우리나라 신성장동력 개발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너무 전문적인 용어로만 되어 있어서 도대체 이것이 산업 발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고 단장에게 방사광가속기가 무엇인지 쉬운 용어로 설명해 달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현미경이라고 보면 되죠. 원자나 분자의 운동 상태를 빛을 이용해서 관측할 수 있는 현미경입니다. 다만 현재 가동 중인 3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정지 상태를 볼 수 있는 스틸 카메라라면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운동 상태를 볼 수 있는 일종의 동영상 카메라입니다.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 발생하는 수십억 분의 일보다 빠른 광원을 통해 화학촉매반응, 분자결합, 생체반응과 같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 변화 과정을 확인할 수 없던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됩니다.”
고 단장에 따르면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나노물질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파장이 짧은 X선을 이용해야 한다. 4세대 방사광을 통해 크기가 1m의 10억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나노 크기의 물질을 볼 수 있다는 것. 고 단장은 “더 작은 물질을 보기 위해서는 더 큰 가속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말했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3세대 방사광가속기만으로도 우리나라 산업은 비약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고 단장은 삼성전자 휴대폰과 관련된 일화를 하나 들려줬다.
“삼성전자가 처음 만들었던 통신칩은 불량률이 70~80%가 넘었죠. 제조업에서 이 정도면 만드는 즉시 가져다 버린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죠. 삼성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삼성종합기술원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거기서도 해결이 안 됐습니다. 결국 이곳으로 가져와서 반도체 적층하는 과정을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해 분석했는데 부품들을 정렬해 주는 마크 자체가 비뚤어졌기 때문에 그 위에 쌓는 것이 다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준점이 틀렸는데 이 기준점을 맞다고 가정하고 그 위에 칩을 쌓으니 불량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공장에 연락해 바로 이 부분을 고치니까 불량률이 1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이때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해서 이런 부분들을 잡아내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삼성 휴대폰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 단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2003년 과학저널 네이처 표지에 실린 연구도 3세대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했다고 한다. “국내 벤처업체 크리스탈지노믹스가 비아그라의 화학구조를 3세대 가속기를 활용해 분석해냈습니다. 물론 화이자도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공개를 안 한 것이었죠. 이걸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분석해낸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땅에서, 우리나라 기술로 설계한 장비로 연구한 최초의 네이처 표지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 장비를 이용해서 네이처나 셀 등에 실리는 논문이 많이 발표됐죠.”
이런 일화들 때문인지 과학자들 사이에서 3세대 방사광가속기는 ‘경부고속도로’가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것과 맞먹는다고 비유할 정도다. 현재 건설되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다시 한 번 대한민국 경제를 도약시켜 줄 발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 단장은 4세대 가속기를 통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로 수소 연료 개발을 꼽았다.
“물(H₂O)을 이루고 있는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는 과정이 1000조분의 1초인데 현재 기술로는 이 화학 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개발되어 물의 화학작용을 분석하면 1000조분의 1까지는 아니더라도 1조분의 1 정도까지는 분석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게 되면 수소와 산소를 분리하는 기술에 조금 더 근접하게 되어 수소연료자동차 개발이 훨씬 앞당겨지겠지요. 수소를 값싸고 효율적으로 물에서 분리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물이 석유를 대체하게 될 것입니다.”
신약개발도 비약적 발전이 가능해진다. 현재 단백질과 같은 생체분자의 원자구조를 분석하려면 결정체를 만들어서 방사광가속기에 넣고 돌려야 한다. 하지만 결정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결정을 만들기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결정을 만들지 않고도 단백질 구조를 분석할 수 있게 된다. 생체막 단백질의 연구는 현재는 개발 불가능한 신약개발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인류 건강에 획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4세대 가속기는 태양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광합성 반응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어 미래 에너지원이나 농업기술 개발에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과학자들의 다양한 가설과 아이디어가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현재의 연구를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과학적 환경이 4세대 가속기를 통해 탄생하는 셈이다.
3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원형인 데 비해 4세대는 직선형이다. 4세대 가속기를 짓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포항가속기연구소에 있는 원형의 3세대 가속기는 둘레가 280m인데, 직선형인 4세대 가속기의 총길이는 직선거리 1.1㎞다. 고 단장은 “전 세계적으로 1㎞가 넘는 직선거리를 연구소 부지 내에 확보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 정도밖에 안 된다”며 “완공되면 1층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규모”라고 말했다.
포항공대에 3·4세대 가속기가 한꺼번에 들어설 수 있었던 데에는 숨겨진 일화가 있다. 특히 원형인 3세대에 비해 선형인 4세대는 훨씬 많은 부지를 필요로 한다. 현재 4세대 가속기는 72만7272㎡(22만평)의 땅 위에 건설 중인데 이는 이미 1990년에 확보된 것이다. 부지 확보와 관련한 고 단장의 이야기다.
“가속기 건설이 결정된 1987년 여름에 처음 논의됐던 부지의 넓이는 9만평 정도였습니다. 포항공대에서 일을 추진하다 보니 이런 부분도 포항제철 정명식 사장의 결재를 맡아야 했죠. 그래서 사장을 찾아가 9만평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는데 사장이 ‘다음에 짓고 싶어하는 크기가 얼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다음에 지을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머뭇거렸더니 ‘그러면 현재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가 어느 정도냐’고 해서 둘레가 1400m인 것이 최대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게 들어갈 만한 크기의 부지가 얼마인지 경계선을 그어보라고 해서 그은 게 22만평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땅이 그렇게 유효하게 쓰일 줄 몰랐는데 지금 이렇게 쓰이는 거죠. 만약 그 당시 포철 박태준 회장님이나 정 사장님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4세대 가속기 건설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윗분들은 지금처럼 분기별로 얼마의 이익을 내야 하는지 빠듯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회사가 10년 뒤에 어떻게 돼야 할지를 고민하셨던 분들인 것 같습니다.”
고 단장과 함께 4세대 방사광가속기 건설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차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실제로 보니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2011년 9월부터 시작해 건물을 설계하고 착공해서 현재는 토목공사가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지금은 바닥, 양쪽 벽, 천장의 두께가 각각 2m씩 되는 두꺼운 콘크리트 구조물을 올리고 있는 중이죠.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2014년 11월 말에 1100m 길이의 전체 건물이 준공될 것입니다. 그 후에 기계 장치를 설치하는 데 1년 이상 소요될 것이고, 전체 시스템을 동작시키는 시운전을 하는 데 3~6개월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시운전을 할 때에는 일부 과학자들이 와서 실험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실제 이용을 할 수 있는 시기는 2016년 후반기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4세대 가속기는 3세대와 달라서 많은 사람들이 쓰는 범용 기계가 아니고 뛰어난 소수의 과학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연구장치라서 외국의 우수한 과학자들도 우리의 가속기 구축이 완료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거대한 구조물과 그곳을 가득 채울 첨단장비를 생각해 보니 투입되는 예산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고 단장 역시 “가속기 건설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돈을 따오는 일”이라고 했다.
“돈이 워낙 많이 들어가는 일이고, 어느 지역에 세워지느냐에 따라서 그 지역 발전과 연관이 깊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들이 국가 주도로 가속기를 건설합니다. 민간기업이 가속기를 세운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2004년에 처음 계획됐던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우여곡절 끝에 2010년에 4000억원의 예산이 배정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등이 4세대 가속기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며 지원을 약속했지만 행정적 절차를 거치는 데만 6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이마저도 정치권의 이해관계로 인해 일부 예산이 삭감되기도 했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완공된다 해도 현재 기술로 이 장비를 100%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에서 필요로 하는 성능을 가진 카메라가 전 세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카메라 개발을 위해서 4세대 가속기 보유국이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미국과 일본이 손을 잡았고 우리나라는 독일과 협력해 미·일과 경쟁하는 구도다. 고 단장은 이 부분에 와서 우리나라 대기업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반도체 하면 우리나라가 세계 1위 아닙니까. 카메라 렌즈 기술에 있어서 세계 1위 기술을 가진 독일이 (이 분야에 기술이 부족한) 우리나라와 손을 잡은 것은 바로 이 반도체 기술 때문입니다. 원하는 수준의 카메라를 개발하려면 CCD(카메라용 집적소자)가 개발되어야 하는데 결국은 반도체 기술이 필요한 거거든요. 그래서 독일이 삼성이나 하이닉스 같은 데서 이 부분에 협력을 해주면 자기네들 기술을 주겠다는 겁니다. 근데 이 부분에 있어서 삼성이 잘 설득이 안 됩니다. 사실 (삼성에)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이게 어떤 기회인지 잘 알 텐데요. 이 부분은 꼭 기사화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국내의 과학자들은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가동되면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만큼 이 장비는 우리나라 과학 수준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 놓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목소리다.
고 단장은 “3세대 방사광가속기가 백화점이라면, 4세대는 명품관”이라며 “이런 명품관이 세계에서 3번째로 우리나라에 들어선다고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그는 “3세대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30개국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 희소성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며 “3세대는 고객을 유치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4세대 가속기는 서로 이용하기 위해 몰려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 교수는 “당연히 우선 사용권은 우리나라에 있지 않겠냐”며 웃었다.
박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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