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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나노세계 들여다보는 가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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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 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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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가속기, 비아그라·타미플루 만든 숨은 공신

[중앙일보] 입력 2016.05.10 02:30   수정 2016.05.1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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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경북 포항시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전자(electron) 가속실험에 성공했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4세대 가속기 운전을 시작한 것이다. 4세대 가속기는 태양이 내뿜는 빛보다 100경(10의 18승) 배 강한 빛을 만들 수 있다. 지난 2일 가동을 시작한 4세대 가속기 내부를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취재했다. 가속기 가동 중에는 한 시간 만에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치명적인 전자기파가 발생한다. 포항가속기연구소의 협조를 얻어 가속기 가동을 잠시 멈추고 취재를 진행했다.

[궁금한 화요일] 나노세계 들여다보는 가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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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가속기연구소는 포항시 남구 포스텍(옛 포항공대) 캠퍼스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져 있다. 신분 확인을 거친 다음에야 연구소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거대한 도넛 모양의 3세대 가속기로 1995년부터 가동되고 있다. 바로 옆에 완공된 4세대 가속기는 3세대 가속기와 겉모습부터 달랐다. 곧게 뻗은 등산 스틱 모양의 4세대 가속기는 건물 길이만 1.1㎞다. 단일 과학 실험장비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3세대 가속기는 도넛 모양 관에서 전자를 뱅뱅 돌리며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킨다. 반면 4세대 가속기는 활시위를 당기듯 전자를 쏴 가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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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수(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겸직) 4세대 방사광가속기구축추진단 단장은 “편의상 3, 4세대로 나눠 부를 뿐 두 가속기는 건물 형태에서 볼 수 있듯 완전히 다른 가속기다. 4세대 가속기는 3세대에 비해 100억 배 강력한 빛을 낸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빛이란 방사광(放射光)을 말한다. 전자는 빛의 속도(초속 30만㎞)에 가깝게 가속되면 방사광을 발하는데 의료 목적으로 쓰이는 X선보다 수억 배 이상 밝다. 이를 활용하면 물질의 내부를 들여다보거나 화학반응 같은 현상을 관측할 수 있어 반도체 개발 등 각종 실험에 활용된다.

4세대 가속기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선 각종 스위치와 모니터로 가득한 조종실을 지나야 했다. 이를 지나자 두께 2m의 거대 철문이 보였다. 철문은 실험장비가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고 연구원들은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을 따라 가속기 내부로 들어간다. 실험 도중 발생할 수 있는 방사선 등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설계했다. 가속기 내부에 서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밝은 터널이 보였다. 이 터널을 따라 각종 장비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4세대 가속기 출발점에는 어른 주먹 2개를 합친 크기의 전자총이 설치돼 있다. 전자총은 전자를 발사하는 장치다. 양궁에 비유하자면 활시위를 당기는 궁사다. 바륨(Ba)·란타넘(La) 등 금속에 강한 레이저 등을 가하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원리다. 고 단장은 “전자총은 4세대 가속기 핵심 부품 중 하나로 포스텍 박사 과정 학생이 3년에 걸쳐 개발한 국산품”이라고 말했다.

전자총에서 튀어나오는 전자의 속도는 광속의 99.5%다. 전자는 직선으로 연결된 가속관을 거치며 광속 100%로 가속된다. 전자는 전기적으로 마이너스(-) 특성이라 이와 반대되는 플러스(+) 극성을 가하면 가속할 수 있다. 가속관은 일종의 전자석이다. 강력한 전기를 가해 빠른 속도로 전자를 밀어낸다. 4세대 가속기 내부엔 총 180개의 가속관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가속관 한 개는 자전거 정도의 길이로 지름은 어른 머리 정도다.

고 단장은 “가속관 180개 중 120개는 공사 초기 일본에서 수입했고 나머지 60개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국내에서 개발된 제품을 썼다”며 “4세대 가속기의 부품 국산화율은 70% 수준이고 설계는 모두 국내에서 진행했다”고 말했다.

가속관을 통해 빛의 속도로 가속된 전자는 마지막 단계로 언듈레이터(undulator)를 지난다. 언듈레이터는 자석 N극과 S극이 짧은 거리로 교차돼 있는 영구 자석이다. 가속된 전자가 이곳을 지나면 좌우로 빠르게 진행 방향이 바뀌고 이때 강력한 방사광이 방출된다.

◆어디에 활용하나=올해 1월 기초과학연구원(IBS) RNA 연구단 김빛내리 단장은 인간 세포 속 마이크로(micro) RNA 생성의 열쇠가 되는 드로셔(DROSHA)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드로셔 단백질이 발견된 지 12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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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과학저널 셀(Cell) 온라인판에 실린 이 연구 결과는 3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방사광은 태양 빛보다 강력해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물질 내부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에 담을 수 있다. 3세대 가속기가 1조 분의 1초를 포착할 수 있다면 4세대는 1000조 분의 1초까지 파악할 수 있다. 4세대 가속기를 통하면 분자가 결합해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을 수 있다.

이기봉(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겸직) 포항가속기연구소장은 “3세대 가속기가 백화점이라면 4세대는 명품점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4세대 가속기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3세대 가속기에서 접근할 수 없었던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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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광가속기는 신종 플루 치료제 타미플루(위) 개발의 숨은 조력자다. 가속기로 단백질 구조를 파악한 덕분에 타미플루가 탄생했다. 나노미터 크기의 톱니바퀴(중간) 제작에도 방사광가속기가 활용된다. 가속기로 촬영한 개미의 모습(아래).


가속기는 신약 개발의 숨은 공로자다.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와 신종 플루 치료제 타미플루는 가속기를 통해 단백질 결합구조를 밝혀낸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

이 소장은 “4세대 가속기는 기존에 들여다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과학 티켓’으로 어떤 결과물이 탄생할지 쉽게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일례로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 물이 만들어지는 화학식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원자 결합 과정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고 단장은 “현재 설치된 4세대 가속기로도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없지만 기술이 진보한다면 이런 과정을 컴퓨터 앞에서 지켜볼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올 것이다”고 했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 이모저모

세발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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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길이만 1.1㎞에 달하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 내부에서 연구원들은 성인 키에 맞춰 자체 제작한 세발자전거를 타고 이동한다. 세발자전거 뒤에는 실험장비를 실을 수 있는 짐칸도 설치했다. 고인수 단장은 “두발자전거도 고려했지만 넘어질 경우 연구원이 다칠 수 있고 장비 파손 우려가 있어 세발자전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4298억원이 투입된 가속기 부품 단가는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달한다.

방사선량 측정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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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가속기연구소 연구원과 직원들은 ID 카드와 함께 방사선량측정기를 항상 목에 걸고 다녀야 한다. 손톱깎이 크기의 방사선량측정기를 3개월마다 교체해 피폭량을 측정한다. 연구소를 처음 방문한 외부 연구원들은 실험 전에 안전교육 코스를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1년 전기료 100억원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하기 위해선 다량의 전기가 필요하다. 전자를 가속하는 가속관은 일종의 전자석으로 전력(電力)을 자력(磁力)으로 바꿔 전자를 밀어낸다. 도넛 모양 3세대 가속기의 1년치 전기료는 80억원 수준이다. 이보다 강력한 4세대 가속기를 1년 동안 가동시키면 전기료만 100억원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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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키(key)

4세대 가속기는 삼중 안전장치를 갖췄다. 우선 ID 카드가 없으면 건물 출입이 불가능하다. 가속기 내부에 접근하기 위해선 ‘키(key) 꽂이’에서 방화문 키를 대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도 ID 카드를 통한 확인 절차가 진행된다. 키는 열쇠점에서 복제할 수 없는 미국산 제품. 모든 키가 제자리에 꽂혀 있지 않으면 가속기를 가동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가속기가 가동될 경우에 대비해 가속기 내부엔 가동 중단 버튼이 곳곳에 마련돼 있다.

덤프트럭 12만 대

포항 지곡산 자락을 깎아 만든 4세대 가속기는 2011년 4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골조공사 등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덤프트럭 12만 대 분량의 흙을 퍼냈다. 12만㎡ 부지에 조성됐지만 포스텍이 소유한 땅을 활용해 토지 매입비는 0원이다. 추진단은 골조공사에 공을 들였다. 전자가 직선으로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가속기 건물의 바닥 평탄도 오차는 ±5㎜에 불과하다. 거제대교(길이 740m)보다 긴 건물의 바닥을 손톱 반 마디 수준으로 일정하게 짓는 것과 맞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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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광(放射光)

전자가 빛의 속도로 가속될 때 나오는 빛을 말한다. 가시광선이나 X선 등 자연계에 존재하는 빛보다 수억 배 이상 밝다. 1947년 미국 전기회사 제너럴일렉트릭(GE)이 처음으로 발견했다.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가속시켜 방사광을 얻는 장치를 말한다. 국내에선 3세대와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가동 중이다.

포항=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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